A conversation with Markus Hustle Lee
by Minjung Suh
A conversation with Markus Hustle Lee by Minjung Suh
A conversation between the painter
Markus Hustle Lee and Minjung Suh
1996년 순천에서 태어난 이주혁은 고등학교 때부터 본 나의 오랜 친구이다.
처음 만났을 때 농구 유니폼 차림으로 하이 파이브를 하고, 거리낌 없이 처음 보는 이들에게 말을 걸며 장난을 치고, ‘마커스 허슬 (Markus Hustle)’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이주혁이 그저 신기했을 따름이다.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 친구랑 처음 말을 트게 됐을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대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다.
학교의 많은 아이가 주혁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재미있는 친구라 생각했고, 거짓말을 못 하는 진실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주혁이의 그림을 맨 처음 본 건 미술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뭘 시키든 주혁이는 늘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스케치북에 그리곤 했다. 어딘가 삐뚤어진 인물 그림은 몸은 정면을 향해 있는데 목이 길고 눈·코·입은 옆을 향한 모습이 특이했다. 그 그림도 주혁이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항상 중앙에 혼자 있는 인물을 그리던 그때 그림에는 색깔이 많았는데, 내 필통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필통을 다 뒤져 노란 형광펜부터 연필까지 그릴 수 있는 도구는 전부 꺼내서 그렸다.
그런 주혁이는 19살 때 조금 조용해졌다. 대학을 안 가고 싶다던 친구가 영국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고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았다. 손바닥보다 좀 더 큰 검정색 스케치북이 잔뜩 쌓여 있던 장면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대학 들어가기 전 여름, 다들 놀기 바빴을 때도 스케치북을 항상 들고 다녔던 게 기억난다. 언제나 그림 속 인물은 중앙에 하나 혹은 둘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림은 늘 침묵이 흘렀고, 인물은 물론 그림 속 모든 물건과 구름, 땅, 나무의 테두리에는 검은 선이 존재했다. 여전히 색깔도 많았다. 나는 그 선들이 시끄러운 색깔들을 조금은 진정시키는 수단 같다고 생각했다. 색깔들은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데, 상반되는 검은색 선은 얌전하게 옆에서 그 소리를 막고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림 속 사람은 누구이며, 검은 선은 왜 있는지, 이렇게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림을 전공하려는 학생이었지만 나와는 다르게 거침없는 주혁이가 궁금해졌던 거 같다. 나는 미국으로, 주혁이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로도 우리는 전화 통화로 그림과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에 가서 처음으로 다양한 사람에게 자기 그림을 보여준 주혁이와 했던 통화가 생각난다. 누가 자기 그림이 별로라며 욕했다고 했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속상했을 거 같은데, “신경 안 써. 내 그림을 설명한 적은 없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 의견일 뿐이고 난 내가 그린 게 맞다고 생각하니까”라고 말했다. 여전히 나랑은 다르게 거침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주혁이는 주혁이대로 작업을 계속하며 서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이어졌다.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페인팅 작업을 하며 갤러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나와 달리 주혁이는 영국에서 슬레이드 미술 대학(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에 진학했다. 내가 갤러리를 그만두고 작업만 하고 있을 때 주혁이는 코로나 19 때문에 석사를 잠시 중단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개인전은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주혁이가 전시회를 생각한다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전시장을 만들면 어떨까? 갤러리 같은 장소 말고 그냥 극장을 빌리는 건 어때? 중간에 의자를 놓고 싶어. 밑에 잔디도 있었으면 좋겠고. 흔한 전시장이 아니라, 뭔가 내 그림이랑 어우러지는 장소였으면 좋겠어.”
왜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최근에 카뮈 책을 읽었거든? 근데 ‘이중의 침묵’ 딱 이 부분에서 네가 그린 그림이 생각나더라. 이중의 침묵–미친 듯한 침묵? 정말 더 이상 고요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 있는 고요함이 느껴지는 네 그림이 떠올랐어.”
그때 주혁이는 처음으로 자기 그림이 폭력적인데 너무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뭔가 일어나려고 하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러다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오면 그것을 깨는 걸 넣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아직 무언가를 정의하고 싶진 않지만 변증법적인 접근을 통해 다른 무언가들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게 이 친구의 작업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점점 알아가는 거 같아. 내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본 적 있는데,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예전에 작업할 때는 나도 이해 못 하거나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그림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야 되나? 퍼즐이 맞춰지는 거 같기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눈 후 결국 주혁이는 현 시점에 전시를 여는데에 있어서 동반되는 여러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먼저 알리고 싶다며, 아트 프린트를 택했다. 현재 나는 내 작업도 하며 국제학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고, 주혁이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여전히 우리는 그림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대화를 나눈다. 오랫동안 이주혁을 봐온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솔직하게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 최근 성수동 한 작업실에서 나눈 우리의 대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서민정 (이하 MS): 잘 지냈어? 이 작업실 햇빛 엄청 세게 들어온다.
이주혁 (이하 JL): 똑같지 뭐. 애들 가르치는 건 어때?
MS: 재밌어. 좀 신선하다고 자주 느껴. 개념적인 면에서도 경험적으로도. 넌 요새 작은 그림 위주로 그리나 보네?
JL: 응, 짐 많아지는 거 싫어서.
MS: 하긴 서울이랑 순천 왔다 갔다 하니까. 예전보다 물감을 더 많이 쓰는 거 같네. 요즘 너에게 (그림이라는 게 아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뭐야?
JL: 난 그림 하나하나에 장문의 글을 쓰고 그러지는 않아. 이미지 하나로 뭔가를 말하는 건데. 그림이라는 매체(medium)가 되게 비밀스러운 동시에 가장 속에 있는 걸 말하는 거 같아.
MS: 네 말은 그럼, 너의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이나 무의식(unconsciousness) 이런 게 너도 모르게 드러난다는 거야?
JL: 둘 다인 거 같아. 의식과 무의식.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들과 나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런 부분들.
MS: 너도 알다시피 페인트라는 재료가 캔버스 위에 던져졌을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우리는 모르잖아. 근데 그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의 결과가 무의식적인 행위나 터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 그래서 의식 위에 더해진 무의식을 통해 페인팅 속 분위기(atmosphere)가 만들어지는데, 난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narrative)의 힘을 믿어. 네가 말하는 무의식은 뭐야?
JL: 신화(mythology)나 성경(bible) 이런 이야기는 반복되잖아.
MS: 반복된다는 게 어떤 의미야?
JL: 인류의 엄청 오래된 이야기, 인간이 탄생한 후부터 끊임없이 반복했던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내 무의식도 딱 그런 인간의 반복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물론 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이랑 지금의 나랑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다르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똑같은 이야기인 거지. 만년 전의 어떤 누군가와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거 같아. 나한텐 그게 내 무의식인 거 같고.
MS: 그 말은 네 무의식 속에 너라는 사람을 떠나 인간으로서 지속돼 왔던 근본적인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거지?
JL: 응, 그렇지.
MS: 그럼 지금 이 그림 중에서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의 너,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고, 현재도 무언가 변화하고 있겠지만 딱 지금 시점의 이주혁이라는 사람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게 어떤 그림인 거 같아?
JL: 자리 잡기 시작한 건 [A person]이랑 [Equity]? 이때 조금씩 강해진 거 같아. 물론 이게 내 파이널은 아니겠지만 점점 다가간다는 걸 느꼈어. 일단 [A song] 같은 경우 기하학적 모양(geometric shape)이라든가 좀 건설적인(constructive) 몸을 만들기 위해 직선이랑 인간의 곡선을 섞으면서 스케치했지. 그걸 시작으로 좀 더 집중해 그려보자 해서 [I wanna live]를 그렸고.
MS: 네 말대로 내가 봐도 <A song>이 다른 그림에 비해 기하학적이고 뭔가 건설적인 느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 굉장히 더 납작(flat)하고 확실한 색깔 블록(color block)이 있어. 반면에 네가 그린 인물(figure)과는 상반되는 자연의 미묘한(subtle) 텍스처와 볼륨이 보이기도 해.
JL: 맞아, 마치 포스터나 아니면 그래픽적인 것들 처럼.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내가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
MS: 어떤 만화들?
JL: 우리 어렸을 때 한국 TV에도 나왔던 ‘카툰네트워크 (Cartoon Network)’, ‘니켈로디언 (Nickelodeon)’ 같은데 나오는 만화.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친형이 방학 때면 미국에서 <캘빈 앤 홉스(Calvin and Hobbes)> 같은 만화책을 사 왔어. 선이 두껍고 명암(shading)은 없는데 색깔 블록이 있는. 학교 가면 수업이 재미없으니까 혼자 ‘내가 만화를 만든다면…’ 생각하면서 종이에 인물들을 상상해서 그렸어. 예를 들면 사람인데 강아지야. 그럼 사람이랑 강아지랑 섞어 그려보기도 하고.
MS: 그럼 네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돼야겠다’ 생각한 처음 시작엔 만화가 있었던 거야?
JL: 응. 처음엔 그냥 재미있으니까 그렸던 거 같아. 우리가 어렸을 때 제일 익숙했던 이미지는 페인팅적인 것이 아니라 캐릭터, 만화 이런 거잖아.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만 쓰는 컴퓨터가 생겨 인터넷으로 블로그 같은 거 보면서 그래피티(graffiti)를 접하게 됐는데, 생각했던 거랑 다르더라고. 내가 생각한 만화 같은 이미지는 만화책이나 TV에서 보던 건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벽에다 그리는 거야. 형이 가져온 스케이트보드만 봐도 거기에 그려진 아트워크가 어린 나한텐 새롭고 더 쿨(cool)하게 느껴졌어.
MS: ‘파워퍼프걸’, ‘덱스터의 실험실’ 이런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터넷 가상세계에 사는 캐릭터잖아. 근데 그래피티는 우리가 만질 수 있고,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는 담벼락 등에 아티스트가 자신의 캐릭터나 이미지를 움직이지 않는 정지 화면(still image)으로 그려 넣은 건데, 그게 너한테 더 ‘쿨’하게 다가왔던 이유가 뭐야?
JL: 나는 그게 성명(statement) 같았어. 무언가 시리즈가 있고 이야기가 있기보단, 그래피티는 고정돼 있고 그 이미지 하나에 집중되잖아. 그거 자체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볼 수 있는 성명 같은 거야. 그리고 되게 자신감이 넘쳐 보였어. 그래피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로고 같은 게 있잖아. 어떨 때는 남의 그래피티 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그런 게 자신감이 넘치면서 뭔지 몰라도 자신만의 성명 같고, 한마디로 ‘쿨’ 그 자체였던 거 같아. 그때 당시 느낌이.
MS: 거기에서 이미지라는 것의 힘을 느낀 거야?
JL: 그렇지.
MS: 그럼 네 그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의 상상 속 인물이야? 아니면 너 자신? 너의 주변 사람들?
JL: 그 모든 거? 이 사람을 보면 나일 수도 있는데, 물론 생긴 게 아니라. 예를 들면 배우는 자기가 맡은 역할(role)에 심취해 연기를 하잖아. ‘어, 얘는 내 친구가 생각나네?’ 싶고, ‘영화 속 캐릭터를 보는 거 같네?’라는 생각도 하고, 뭐… 시가를 쥐고 있는 건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조 페시(Joe Pesci)라든가, 건방진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생각나면서. 그렇게 그리기도 하는데, ‘나’를 그린다는 느낌도 드는 동시에 크게 보면 그냥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만한 모습을 그리는 거 같아.
MS: 네가 말했듯이 그래피티 같은 경우 행위 자체가 성명 같고, 되게 ‘쿨’한 분위기에 반한 거잖아. 근데 마피아나 갱스터 같은 영화 속 인물들도 비슷한 맥락의 배짱이나 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연결 고리가 재미있는 거 같아.
JL: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의 이면은 꽤나 종교적이라고 느끼기도 해. 성경 안의 이야기 같은 거 있잖아. 항상 심판이 뒤따르는…. 재미있어 보이지만 심판의 순간과 그에 따른 결말이 있는 마피아 영화도 인간이라서 반복되는 이야기잖아. 껍질(표면)은 그런 이야기겠지만 아직 나도 잘 모르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해. 역사적으로도 그걸 찾으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그걸 반복하고 있다고 봐.
MS: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라는 건 자기 확신이 있을 때 나오는 감정이잖아. 그런 감정에 끌리게 된 계기가 있어?
JL: 소년물(shōnen manga) 만화책을 보면 주인공에게 꿈과 모험심이 있고, 그것을 좇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거든. 근데 그런 소년물에 담긴 이야기도 정말 오래된, 예를 들면 <오디세이(Odyssey)>의 내용이 다른 표현 방법으로 반복되거나 이어지고 있는 거야. 껍질만 계속 다를 뿐이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엔 자신감이 갖게 돼.
MS: 내가 볼 때 네가 그런 반복되는 이야기를 의식하게 된 데는 너의 개인적인 경험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감히 예상해보자면?
JL: 아마도 사춘기 때 같아. 내가 사는 세상이 너무 좁아 보였고, 속에 묻어둬 답답한 많은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어. 세상을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나’의 삶을 찾고 내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지. 그때 좀 더 사적인(personal) 그림, 내가 진짜로 느끼는 걸 그리기 시작한 거 같아.
MS: <Equity>, <A person>, <I wanna live> 를 보면 명백한 폭력의 흔적이 있잖아. 총, 화살 같은 오브제(objet)나 누군가를 겨누는 행위 같은 것. 이런 폭력이라는 주제를 넌 그때부터 의식한 거야?
JL: 응. 근데 그 그림들에서는 그냥 인간에 대한 걸 그렸다고 생각했어. 거기에 폭력이 포함될 수 있는 거겠지. 알다시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간의 비극과 희극을 이야기했잖아. 총이나 화살, 폭력의 이미지를 통해 그렇게 또 반복적인 비극과 희극을 나타내고 싶었어.
MS: 그렇다면 <A song>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어?
JL: <A song>은 원래 기타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기타가 없어. 기타를 들기 전의 이야기야. 이 인물은 이 방 안에서 “I will sing my song”이라는 걸 꿈꾸는 인간이야.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전 단계의 인간. 좁은 세상에 있었던 나 같아. 작은 내 방 안에서 세상에 질문하기 시작한 나.
MS: 그러네. 유일하게 이 그림이 내부에 있는 인물이네.
JL: 그리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자연은 다가올 시작,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아.
MS: 너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중에 폭력이란 주제는 그냥 일부분이겠지만, 너 그림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난 계속 그 부분에 눈이 가는 거 같아. 네가 표현하는 폭력은 되게 소리가 없다고 해야 되나? 소음이 많은 다이내믹한 액션이 가미된 폭력이라기보다 전에도 말했지만 뭔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순간? 정말 죽음과 같은 정적(dead silence)같이. 너는 이런 무음이 더 폭력적으로 느껴져? 아니면 이런 순간이 너한테는 더 의미가 있는 거야?
JL: 글쎄.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내가 말하는 건 아직은 좀 이른 시기인 거 같아.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소리가 없을 때 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의식과 무의식, 직선과 곡선, 실내와 실외, 이미지와 파인 아트, 소음과 무음, 파괴와 건설.
정말 상반되는 무수한 개념이 이주혁 작가의 그림에 담겨 있다.
이 친구의 캔버스 안에는 한 주제에서 다른 두 개념 사이의 균형을 찾아나가려는 흔적이 있고,
그 모두를 포함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 특정한 순간을 보다 솔직하고 투명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런 부동의 자세와 고요를 택한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 개념이 결국엔 어디에 자리 잡을지, 어떤 정의를 받게 될지, 혹은 여전히 그 상태로 지속될지,
이 모든 것에 관해 앞으로도 대화를 나누고 싶고, 어떻게 주혁이의 그림에 스며들지 궁금하다.
주혁이의 그림을 맨 처음 본 건 미술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뭘 시키든 주혁이는 늘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스케치북에 그리곤 했다. 어딘가 삐뚤어진 인물 그림은 몸은 정면을 향해 있는데 목이 길고 눈·코·입은 옆을 향한 모습이 특이했다. 그 그림도 주혁이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항상 중앙에 혼자 있는 인물을 그리던 그때 그림에는 색깔이 많았는데, 내 필통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필통을 다 뒤져 노란 형광펜부터 연필까지 그릴 수 있는 도구는 전부 꺼내서 그렸다.
그런 주혁이는 19살 때 조금 조용해졌다. 대학을 안 가고 싶다던 친구가 영국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고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았다. 손바닥보다 좀 더 큰 검정색 스케치북이 잔뜩 쌓여 있던 장면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대학 들어가기 전 여름, 다들 놀기 바빴을 때도 스케치북을 항상 들고 다녔던 게 기억난다. 언제나 그림 속 인물은 중앙에 하나 혹은 둘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림은 늘 침묵이 흘렀고, 인물은 물론 그림 속 모든 물건과 구름, 땅, 나무의 테두리에는 검은 선이 존재했다. 여전히 색깔도 많았다. 나는 그 선들이 시끄러운 색깔들을 조금은 진정시키는 수단 같다고 생각했다. 색깔들은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데, 상반되는 검은색 선은 얌전하게 옆에서 그 소리를 막고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림 속 사람은 누구이며, 검은 선은 왜 있는지, 이렇게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림을 전공하려는 학생이었지만 나와는 다르게 거침없는 주혁이가 궁금해졌던 거 같다. 나는 미국으로, 주혁이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로도 우리는 전화 통화로 그림과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에 가서 처음으로 다양한 사람에게 자기 그림을 보여준 주혁이와 했던 통화가 생각난다. 누가 자기 그림이 별로라며 욕했다고 했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속상했을 거 같은데, “신경 안 써. 내 그림을 설명한 적은 없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 의견일 뿐이고 난 내가 그린 게 맞다고 생각하니까”라고 말했다. 여전히 나랑은 다르게 거침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주혁이는 주혁이대로 작업을 계속하며 서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이어졌다.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페인팅 작업을 하며 갤러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나와 달리 주혁이는 영국에서 슬레이드 미술 대학(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에 진학했다. 내가 갤러리를 그만두고 작업만 하고 있을 때 주혁이는 코로나 19 때문에 석사를 잠시 중단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개인전은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주혁이가 전시회를 생각한다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전시장을 만들면 어떨까? 갤러리 같은 장소 말고 그냥 극장을 빌리는 건 어때? 중간에 의자를 놓고 싶어. 밑에 잔디도 있었으면 좋겠고. 흔한 전시장이 아니라, 뭔가 내 그림이랑 어우러지는 장소였으면 좋겠어.”
왜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최근에 카뮈 책을 읽었거든? 근데 ‘이중의 침묵’ 딱 이 부분에서 네가 그린 그림이 생각나더라. 이중의 침묵–미친 듯한 침묵? 정말 더 이상 고요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 있는 고요함이 느껴지는 네 그림이 떠올랐어.”
그때 주혁이는 처음으로 자기 그림이 폭력적인데 너무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뭔가 일어나려고 하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러다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오면 그것을 깨는 걸 넣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아직 무언가를 정의하고 싶진 않지만 변증법적인 접근을 통해 다른 무언가들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게 이 친구의 작업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점점 알아가는 거 같아. 내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본 적 있는데,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예전에 작업할 때는 나도 이해 못 하거나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그림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야 되나? 퍼즐이 맞춰지는 거 같기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눈 후 결국 주혁이는 현 시점에 전시를 여는데에 있어서 동반되는 여러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먼저 알리고 싶다며, 아트 프린트를 택했다. 현재 나는 내 작업도 하며 국제학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고, 주혁이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여전히 우리는 그림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대화를 나눈다. 오랫동안 이주혁을 봐온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솔직하게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 최근 성수동 한 작업실에서 나눈 우리의 대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서민정 (이하 MS): 잘 지냈어? 이 작업실 햇빛 엄청 세게 들어온다.
이주혁 (이하 JL): 똑같지 뭐. 애들 가르치는 건 어때?
MS: 재밌어. 좀 신선하다고 자주 느껴. 개념적인 면에서도 경험적으로도. 넌 요새 작은 그림 위주로 그리나 보네?
JL: 응, 짐 많아지는 거 싫어서.
MS: 하긴 서울이랑 순천 왔다 갔다 하니까. 예전보다 물감을 더 많이 쓰는 거 같네. 요즘 너에게 (그림이라는 게 아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뭐야?
JL: 난 그림 하나하나에 장문의 글을 쓰고 그러지는 않아. 이미지 하나로 뭔가를 말하는 건데. 그림이라는 매체(medium)가 되게 비밀스러운 동시에 가장 속에 있는 걸 말하는 거 같아.
MS: 네 말은 그럼, 너의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이나 무의식(unconsciousness) 이런 게 너도 모르게 드러난다는 거야?
JL: 둘 다인 거 같아. 의식과 무의식.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들과 나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그런 부분들.
MS: 너도 알다시피 페인트라는 재료가 캔버스 위에 던져졌을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우리는 모르잖아. 근데 그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의 결과가 무의식적인 행위나 터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 그래서 의식 위에 더해진 무의식을 통해 페인팅 속 분위기(atmosphere)가 만들어지는데, 난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narrative)의 힘을 믿어. 네가 말하는 무의식은 뭐야?
JL: 신화(mythology)나 성경(bible) 이런 이야기는 반복되잖아.
MS: 반복된다는 게 어떤 의미야?
JL: 인류의 엄청 오래된 이야기, 인간이 탄생한 후부터 끊임없이 반복했던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내 무의식도 딱 그런 인간의 반복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물론 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이랑 지금의 나랑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다르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똑같은 이야기인 거지. 만년 전의 어떤 누군가와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거 같아. 나한텐 그게 내 무의식인 거 같고.
MS: 그 말은 네 무의식 속에 너라는 사람을 떠나 인간으로서 지속돼 왔던 근본적인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거지?
JL: 응, 그렇지.
MS: 그럼 지금 이 그림 중에서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의 너,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고, 현재도 무언가 변화하고 있겠지만 딱 지금 시점의 이주혁이라는 사람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게 어떤 그림인 거 같아?
JL: 자리 잡기 시작한 건 [A person]이랑 [Equity]? 이때 조금씩 강해진 거 같아. 물론 이게 내 파이널은 아니겠지만 점점 다가간다는 걸 느꼈어. 일단 [A song] 같은 경우 기하학적 모양(geometric shape)이라든가 좀 건설적인(constructive) 몸을 만들기 위해 직선이랑 인간의 곡선을 섞으면서 스케치했지. 그걸 시작으로 좀 더 집중해 그려보자 해서 [I wanna live]를 그렸고.
MS: 네 말대로 내가 봐도 <A song>이 다른 그림에 비해 기하학적이고 뭔가 건설적인 느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 굉장히 더 납작(flat)하고 확실한 색깔 블록(color block)이 있어. 반면에 네가 그린 인물(figure)과는 상반되는 자연의 미묘한(subtle) 텍스처와 볼륨이 보이기도 해.
JL: 맞아, 마치 포스터나 아니면 그래픽적인 것들 처럼.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내가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
MS: 어떤 만화들?
JL: 우리 어렸을 때 한국 TV에도 나왔던 ‘카툰네트워크 (Cartoon Network)’, ‘니켈로디언 (Nickelodeon)’ 같은데 나오는 만화.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친형이 방학 때면 미국에서 <캘빈 앤 홉스(Calvin and Hobbes)> 같은 만화책을 사 왔어. 선이 두껍고 명암(shading)은 없는데 색깔 블록이 있는. 학교 가면 수업이 재미없으니까 혼자 ‘내가 만화를 만든다면…’ 생각하면서 종이에 인물들을 상상해서 그렸어. 예를 들면 사람인데 강아지야. 그럼 사람이랑 강아지랑 섞어 그려보기도 하고.
MS: 그럼 네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돼야겠다’ 생각한 처음 시작엔 만화가 있었던 거야?
JL: 응. 처음엔 그냥 재미있으니까 그렸던 거 같아. 우리가 어렸을 때 제일 익숙했던 이미지는 페인팅적인 것이 아니라 캐릭터, 만화 이런 거잖아.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만 쓰는 컴퓨터가 생겨 인터넷으로 블로그 같은 거 보면서 그래피티(graffiti)를 접하게 됐는데, 생각했던 거랑 다르더라고. 내가 생각한 만화 같은 이미지는 만화책이나 TV에서 보던 건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벽에다 그리는 거야. 형이 가져온 스케이트보드만 봐도 거기에 그려진 아트워크가 어린 나한텐 새롭고 더 쿨(cool)하게 느껴졌어.
MS: ‘파워퍼프걸’, ‘덱스터의 실험실’ 이런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터넷 가상세계에 사는 캐릭터잖아. 근데 그래피티는 우리가 만질 수 있고,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는 담벼락 등에 아티스트가 자신의 캐릭터나 이미지를 움직이지 않는 정지 화면(still image)으로 그려 넣은 건데, 그게 너한테 더 ‘쿨’하게 다가왔던 이유가 뭐야?
JL: 나는 그게 성명(statement) 같았어. 무언가 시리즈가 있고 이야기가 있기보단, 그래피티는 고정돼 있고 그 이미지 하나에 집중되잖아. 그거 자체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볼 수 있는 성명 같은 거야. 그리고 되게 자신감이 넘쳐 보였어. 그래피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로고 같은 게 있잖아. 어떨 때는 남의 그래피티 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그런 게 자신감이 넘치면서 뭔지 몰라도 자신만의 성명 같고, 한마디로 ‘쿨’ 그 자체였던 거 같아. 그때 당시 느낌이.
MS: 거기에서 이미지라는 것의 힘을 느낀 거야?
JL: 그렇지.
MS: 그럼 네 그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의 상상 속 인물이야? 아니면 너 자신? 너의 주변 사람들?
JL: 그 모든 거? 이 사람을 보면 나일 수도 있는데, 물론 생긴 게 아니라. 예를 들면 배우는 자기가 맡은 역할(role)에 심취해 연기를 하잖아. ‘어, 얘는 내 친구가 생각나네?’ 싶고, ‘영화 속 캐릭터를 보는 거 같네?’라는 생각도 하고, 뭐… 시가를 쥐고 있는 건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조 페시(Joe Pesci)라든가, 건방진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생각나면서. 그렇게 그리기도 하는데, ‘나’를 그린다는 느낌도 드는 동시에 크게 보면 그냥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만한 모습을 그리는 거 같아.
MS: 네가 말했듯이 그래피티 같은 경우 행위 자체가 성명 같고, 되게 ‘쿨’한 분위기에 반한 거잖아. 근데 마피아나 갱스터 같은 영화 속 인물들도 비슷한 맥락의 배짱이나 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연결 고리가 재미있는 거 같아.
JL: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의 이면은 꽤나 종교적이라고 느끼기도 해. 성경 안의 이야기 같은 거 있잖아. 항상 심판이 뒤따르는…. 재미있어 보이지만 심판의 순간과 그에 따른 결말이 있는 마피아 영화도 인간이라서 반복되는 이야기잖아. 껍질(표면)은 그런 이야기겠지만 아직 나도 잘 모르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해. 역사적으로도 그걸 찾으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그걸 반복하고 있다고 봐.
MS: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라는 건 자기 확신이 있을 때 나오는 감정이잖아. 그런 감정에 끌리게 된 계기가 있어?
JL: 소년물(shōnen manga) 만화책을 보면 주인공에게 꿈과 모험심이 있고, 그것을 좇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거든. 근데 그런 소년물에 담긴 이야기도 정말 오래된, 예를 들면 <오디세이(Odyssey)>의 내용이 다른 표현 방법으로 반복되거나 이어지고 있는 거야. 껍질만 계속 다를 뿐이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엔 자신감이 갖게 돼.
MS: 내가 볼 때 네가 그런 반복되는 이야기를 의식하게 된 데는 너의 개인적인 경험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감히 예상해보자면?
JL: 아마도 사춘기 때 같아. 내가 사는 세상이 너무 좁아 보였고, 속에 묻어둬 답답한 많은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어. 세상을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나’의 삶을 찾고 내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지. 그때 좀 더 사적인(personal) 그림, 내가 진짜로 느끼는 걸 그리기 시작한 거 같아.
MS: <Equity>, <A person>, <I wanna live> 를 보면 명백한 폭력의 흔적이 있잖아. 총, 화살 같은 오브제(objet)나 누군가를 겨누는 행위 같은 것. 이런 폭력이라는 주제를 넌 그때부터 의식한 거야?
JL: 응. 근데 그 그림들에서는 그냥 인간에 대한 걸 그렸다고 생각했어. 거기에 폭력이 포함될 수 있는 거겠지. 알다시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간의 비극과 희극을 이야기했잖아. 총이나 화살, 폭력의 이미지를 통해 그렇게 또 반복적인 비극과 희극을 나타내고 싶었어.
MS: 그렇다면 <A song>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어?
JL: <A song>은 원래 기타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기타가 없어. 기타를 들기 전의 이야기야. 이 인물은 이 방 안에서 “I will sing my song”이라는 걸 꿈꾸는 인간이야.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전 단계의 인간. 좁은 세상에 있었던 나 같아. 작은 내 방 안에서 세상에 질문하기 시작한 나.
MS: 그러네. 유일하게 이 그림이 내부에 있는 인물이네.
JL: 그리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자연은 다가올 시작,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아.
MS: 너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중에 폭력이란 주제는 그냥 일부분이겠지만, 너 그림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난 계속 그 부분에 눈이 가는 거 같아. 네가 표현하는 폭력은 되게 소리가 없다고 해야 되나? 소음이 많은 다이내믹한 액션이 가미된 폭력이라기보다 전에도 말했지만 뭔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순간? 정말 죽음과 같은 정적(dead silence)같이. 너는 이런 무음이 더 폭력적으로 느껴져? 아니면 이런 순간이 너한테는 더 의미가 있는 거야?
JL: 글쎄.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내가 말하는 건 아직은 좀 이른 시기인 거 같아.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소리가 없을 때 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의식과 무의식, 직선과 곡선, 실내와 실외, 이미지와 파인 아트, 소음과 무음, 파괴와 건설.
정말 상반되는 무수한 개념이 이주혁 작가의 그림에 담겨 있다.
이 친구의 캔버스 안에는 한 주제에서 다른 두 개념 사이의 균형을 찾아나가려는 흔적이 있고,
그 모두를 포함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 특정한 순간을 보다 솔직하고 투명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런 부동의 자세와 고요를 택한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 개념이 결국엔 어디에 자리 잡을지, 어떤 정의를 받게 될지, 혹은 여전히 그 상태로 지속될지,
이 모든 것에 관해 앞으로도 대화를 나누고 싶고, 어떻게 주혁이의 그림에 스며들지 궁금하다.